공연소개하는남자

<할아버지 사진첩을 펼치며 6화> 


[전국유일의 아침식사 배식처, 구세군 마포급식소 이야기]




지난 5화는 구세군대전혜생원(1955년 3월 29일~1957년 9월 27일)의 이야기를 소개해드렸습니다. 


이번 6화에서는 대전혜생원을 떠나 경주(1957년 9월 27일~1958년 10월 26일)로 가셨다가 


2년 후 서울의 구세군 마포교회(1958년 10월 26일~1964년 6월 25일)에서의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구세군 마포교회 급식소 배식 장면]




조부의 사진첩에서 가장 많은 분량의 사진이 있는 구세군마포교회(3대 목회자)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당시 서울의 마포는 어렵기로 소문난 지역 중 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포에 구세군 급식소를 설치하여 운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구세군에서는 총 7군데의 급식소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는데,

 

조부께서 맡으셨던 마포에서는 한국 사람들은 아침을 든든히 먹어야 한다며


본영에 요청하여 새벽부터 급식을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급식소를 찾는 분들 사이에서 “아침은 마포에서, 점심은 서대문에서...”라는 말이 회자되었다고 합니다. 

 






[조부 회갑기념 사진(1962.10.27)]




제가 보기엔 마포영문은 조부께 가장 의미 있는 곳으로 보입니다. 


조부께서는 이곳에서 회갑(1962년)을 맞으셨습니다. 






[한강변 이촌동 수재민 부락에 세운 천막교회(1962.11.11)]




회갑 때 들어 온 돈으로 


한강 변 서울 이촌동 수재민 부락에 천막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 천막교회는 1965년 11월 25일에 봉천동으로 이사하여 현재의 구세군 봉천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마포에서 6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급식을 하시다보니 몸이 많이 상하게 되셨습니다.


극도의 스트레스와 피곤으로 인해 결국 담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침 배식을 마친 후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였고, 그날부터 3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수술 후(1962년~1963년 사이 2번에 걸쳐 담낭 절제 수술) 몸은 더욱 악화되어 목회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조부의 마포에서 6년간의 목회 동안에 400명의 회개인이 늘었다고 합니다.

 

또한 수술 후 담당의(담당의사 허경발 박사)는 2년 밖에 살 수 없다고 하셨으나 


14년을 더 사시면서 많은 일들을 하셨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구세군 마포교회 급식소 전경]




구세군 마포 급식소는 조부의 사역 중 가장 힘들었지만 가장 보람있는 곳 중의 하나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다른 급식소는 점심 급식을 운영하였으나 


유독 조부께서만 새벽부터 힘들게 아침급식을 운영하셨습니다.



하지만 조부께서 급식소를 운영하면서 급식물량을 빼돌린다는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셨습니다. 


결국 경찰까지 출동하여 장부와 재고조사를 하였으나 


허위임이 밝혀지게 되어 계속 운영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부께서는 이 일로 마음에 많은 상처를 받으시고 이로 인해 몸도 상하게 되어 


결국 담석으로 인한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조부께서는 이 수술로 인해 약해진 몸에도 불구하고 목회와 급식에 더욱 힘을 쏟으셨습니다. 


하지만 조부의 건강을 핑계로 다른 목회지로 이동할 것을 요구하는 일부 성도들의 성화가 구세군 본영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구세군 본영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조부로 하여금 1964년 6월 25일, 


구세군 저동교회로 이동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이 명령은 조부로 하여금 많은 상처를 받게 하였고, 


이로 인해 결국 새로 옮겨간 구세군 저동교회에서 63세로 조기 은퇴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서울 뚝섬침례교회 유종수 목사와 함께(2015.1.10)]



이렇게 마포에서의 길고도 힘들었던 목회의 끝은 조부로 하여금 실망으로 끝을 맺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마포에서의 6년간 목회에서 숨은 열매가 맺혀지고 있었습니다. 


현재 서울 뚝섬침례교회에서 목회하시는 유종수 목사 가정은 당시 조부와 함께 급식소에서 봉사를 하였습니다.

 

조부께서는 10명이나 되는 대가족인 유종수 목사의 가정을 남달리 걱정하시며 아끼셨고 


이것이 지금도 인연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2000년에 신학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뚝섬침례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5월에 제 결혼식 주례를 해주셨습니다.


제게는 2년간 짧은 기간의 전도사 사역이었지만 지금도 큰 일이 생기면 목사님을 찾아 뵙고 조언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조부의 흔적이 부친에게까지 이어지고, 그 인연은 저에게까지 직접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은혜를 악으로 갚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은혜를 기억하고 보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부께 은혜를 입은 분들 중에 그것을 악으로 갚았던 사람보다는 


그 은혜를 기억하고 보답하려는 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분들에게 조부는 언제나 사람을 아끼며 선을 베풀었으며 목회자이지만 


자신들의 친정아버지처럼 생각하며 믿고 따를 수 있는 분으로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우연하게 시작한 조부의 사진첩 이야기를 연재하며 만났던 그 분들의 그 기억은 


저로 하여금 또 다른 사람에게 조부의 행하셨던 흔적을 기록하게 만들었고, 


그 기록을 남기는 저로 하여금 조부의 행적을 제 삶의 또 다른 목표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제 그 목표를 실천으로 옮겨야만 할 이유가 생긴 셈입니다. 


제게 또 다른 삶의 목표를 발견하게 한 조부의 사진첩, 


소중히 보관하며 마음에 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공소남 허윤기 덜뜨기

<할아버지의 사진첩을 넘기며...4화> - 절망 속에서 지켜야 할 동심



<촬영일자 1951년 4월 20일>


이번에는 대한민국의 슬픈 역사, 1950년대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조부께서 전쟁 발발 직후 개성에서 피난 민 500명을 구호해 주고, 서울 후생학원 215명의 고아를 수용 중 서울까지 처들어 온 공산당을 피해 피난을 가야 했지만, 고아들을 친자식처럼 여겨 버리고 피난을 갈 수 없어 결국 아이들을 모아 놓고 유언을 하셨습니다.


 "애들아 나는 너희들을 버려두고 차마 어디로든 갈 수가 없다. 공산군이 오면 우리 내외는 죽일 것이다. 난 여기서 죽을 결심을 했다. 내가 죽거든 뒷산에 묻고, 내 아들 딸은 원장 자식이라 하지 말고 같이 살아라. 공산군은 고아는 죽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렇게 유언을 하셨는데, 그 중에는  구세군 사관(목사) 자녀 7명도 함께 보호를 하고 있었는데, 고아들 중 한 사람도 비밀을 발설하지 않고 모두 고아로 속여서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인민군으로 입대를 시키려는 것을 고아라는 이유로 읍소하여 입대를 면할 수 있게 해 주었다고 함). 그리고 당시 구세군 사령관 관사와 구세군 사관학교에 <고아원 분원>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고아들을 수십명씩 낮에 뛰어놀게 해서 빼앗기지 않게 했다고 합니다.


당시 브라스밴드가 경성방송국에 하나, 후생학원에 하나가 있었는데, 당시 영국에서 온 제일 좋은 트럼펫이 후생학원에 있는 것을 알고 인민군 장교가 와서 접수하겠다고 하며, 악기와 함께 밴드를 모두 납북을 하려고 했답니다. 이때, 조부께서 "내가 잘은 모르겠지만, 김일성 장군께서 고아원 악기를 뺏어 오라고 시켰는가?"라며 따지자 인민군이 따발총으로 할아버지를 쏘려고 하는데 할머니는 놀라서 기절하시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공산당 장교는 일단 넘어갔다가 며칠 후, 악대와 악기를 모두 빼앗아 북한으로 갔다고 합니다. 


* 당시 납북된 후생학원 브라스밴드 18명 명단 *


강태설, 한기석, 김용덕, 이순은, 양태환, 홍갑용, 손희주, 백장기, 김기모, 이종수, 

김기영, 차광욱, 정생규, 박종운, 김주영, 이양수, 이길남, 박성수 

(진주에서 보낸 정준삼 사관의 보고서로 명단 확인) 


- 악대원 중에서 고*호 군만 납북 도중 유일하게 탈출, 후에 육군군악대장 역임.



당시 고아들을 불쌍히 여겨 헌신적으로 살은 이유일지는 모르지만 몇 번이나 위기를 넘기고 살아나셨는데, 당시 인민군은 후퇴하면서 할아버지를 죽이려고 했고, 국군은 들어오면서 인민군과 친하게 지냈다고 죽이려 했는데 잠깐 떠난 피난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215명의 고아 중, 도망가지 않고 남아 있는 고아 170명만 제주로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170명이나 되는 피난을 갈 방법이 없어 피난을 갈 수 없는 도중에 인민군이 쳐들어 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조부께서는 서투른 영어로 미군을 찾아가 고아원 원장임을 밝히고 200명 가까이 데리고 사는데 불쌍한 아이들을 데리고 피난을 갈 방법이 없다고 하소연을 하면서 '당신도 자식들이 있지 않는가?'라며 서투른 영어로 말을 하자, 장교가 감동을 받아 책임지고 피난을 약속, 부산까지 군용트럭에 싣고 가서 부산항에서 LST배를 타고 제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군과 한국군 장교의 도움으로 대부분의 원생들을 데리고 피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군 LST배를 타고 제주도로 피난을 가신 후, 조부께서는 구세군 제주 후생학원을 설립하게 됩니다. 







사진 중앙에 군복을 입고 앉아 계신 분이 제 조부(허원조 사관), 조모(김옥녀 사관)이십니다. 당시 제 부친(허진 사관)은 8살의 어린이였습니다(우측에서 4번째 검은색 새라복을 입은 어린이). - 아이들의 옷에 새겨진 SABH는 The Salvation Army Boy's Home; 구세군 후생학원의 약자입니다.





(사진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일본주재 미공군단에서 풍금을 제주후생학원에 기증할 때 촬영한 것으로 보아 1952년 정도로 추정)


조부(허원조 사관)께서는 미군의 도움으로 제주도로 함께 피난을 가신 후 "제주후생학원"을 세우신 후, 전쟁고아들을 보살피셨습니다. 동아일보 기자이셨던 조부께서는 사진을 남기시는 일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또한 음악에 관심이 많으셨던 터라 구세군 후생학원 브라스밴드를 만들어 원생들에게 금관악기를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당시 브라스밴드는 대한민국에 몇 개 되지 않았던 때라고 합니다. 이렇게 음악을 배운 아이들과 함께 피난하고 있던 제주 지역사회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1953년 제주 구세군후생학원(원장 허원조 부령)이 제주읍장에게 감사장 전달>


그렇게 제주도에서 고아들을 양육하며 음악을 가르치신 것으로 1953년 10월 17일 제주읍장에게 감사장을 전달하며 지역사회에서 고아들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들을 하신 것 같습니다. 사진과 음악에 관심 많으셨던 조부께서는 이렇게 전쟁 이전과 전쟁 속에 부모님을 잃은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신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었던 한국전쟁 속에서도 흔들리면 안되는 동심을 위한 조부의 노력을 몇 장의 사진으로 보면서 손자인 제가 코끝 찡한 감동을 받습니다. 2014년의 대한민국도 힘들고 어려운 시간 속에 있지만 그럼에도 절망은 희망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희망으로 일어서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Posted by 공소남 허윤기 덜뜨기

<1936소년들에게 나팔과 삽빗자루를 주다 >




<포항구세군 소년부 청소대원 일동, 1936 4>


 조부께서는 사부동(1931)을 떠나 낙평(1932), 영덕(1934)에서 목회를 하시다가 1935년에 포항으로 목회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구세군은 현재에도 군대처럼 발령을 받아 목회지를 옮기는 방식을 갖고 있습니다그래서 당시 조선 총독부에서는 구세군을 영국 군대로 이해하고 위협적인 존재로 생각을 하여 예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그래서 다른 교단의 목회자들과는 달리 구세군 사관(목사)의 발령에 대해서만 조선총독부 관보에 기재를 하였습니다덕분에 일제치하에서의 구세군 사관의 발령 기록은 구세군의 기록보다 더 정확하다는 웃지 못 할 일도 있습니다.


  구세군 포항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 1935년 이후 1년 반 동안에 280명이 회개를 하였다는 놀라운 기록을 발견하였는데 이 한 장의 사진을 보고 기록의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조부께서 부임하던 1935년 이전에 구세군 포항교회는 전임 목회자의 문제로 인해 교회가 문을 닫은 상태였기 때문에 교인이 거의 없었습니다이런 상황에서 조부께서는 소년들을 모아 손에 나팔과 삽빗자루를 나눠주고 새마을 운동처럼 동네 청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처음 시작할 때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던 주민들이 소년들의 청소가 시작됨을 알리는 나팔소리와 함께 동네가 깨끗해지는 모습을 보며 조금씩 동참을 하기 시작했고이것이 구세군 포항교회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주게 되었습니다조부의 목회 1년 반 만에 280명이나 되는 분들이 회개를 하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 교회를 향한 사회의 시선이 냉소적임을 알고 있습니다조부와 부친의 뒤를 이어 목사인 저 역시 이 현상에 대해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교회의 이기적인 모습과 교회답지 못한 모습에 실망하는 것은 목사인 저의 잘못 역시 크기 때문입니다조부께서는 이미 78년 전에 세상 속에서 교회의 역할에 대한 중요성을 알고 교회를 키우는 일이 아닌 동네를 위한 교회의 일을 찾아 교회 밖으로 나가셨다니 놀랍습니다왜냐하면 일제치하에서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들을 찾아 모범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삶을 선택하셨던 조부의 모습을 사진으로 만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Posted by 공소남 허윤기 덜뜨기

할아버지의 사진첩을 펼치며 (1회) 


“사진은 순간을 영원으로 남기는 것”





[1928년 10월, 조부의 구세군사관학교 입학식 사진(광화문 정동)]



15년 전 큰 아버지의 소천 후, 제 부친에게 전해온 2권의 사진첩이 부친의 방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최근에 그 사진첩의 존재를 알게 되어 펼쳐보게 되었습니다. 

그 중 오래된 사진첩의 첫 장의 사진인 86년 전 

조부의 구세군 사관학교(신학교) 입학식 모습은 제게 경외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제 조부, 허원조 사관(목사)은 1902년 5월 8일 경남 고성군 대가면 유흥리에서 

제 증조부 허정현(1873년 10월 20일)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1928년 10월, 구세군 사관학교 19회로 입학을 하였습니다. 

바로 그 해, 다들 아시는 구세군 자선냄비기 처음 시작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 조부는 사관학교 입학 전에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시면서 

갖고 계시던 카메라로 많은 사진들을 남기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많은 사진들 중에서 단 2권만이 현재 남아 제 부친께 남겨졌습니다.


제가 6살이던 1978년 9월 3일에 조부께서 소천하셨기 때문에 저는 조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주위에서 제 조부는 키도 크고 호인이셨다는 말만 들었을 뿐, 

사진을 보기 전엔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진들을 보며 부친께서 제게 전해주시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조부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부에 대한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들으니 너무나도 생생하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1922년 1월, 조부의 약혼식 사진]



  사진첩을 한 장 더 넘기니 1922년 1월에 촬영한 조부의 약혼식 사진이었습니다. 

제 조모 김옥녀 사관은 1905년 7월 19일 충북 옥천에서 김재영 집사의 장녀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3년 이 되던 1925년 1월 결혼을 하셨습니다. 

제 부친이 1945년에 막내로 태어나셨으니 결혼 후 23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지금이야 디지털 사진의 메타 값이 저장되어 있으니 언제 촬영한 사진인지 알 수 있지만 

인화된 사진엔 그런 정보가 없습니다. 

하지만 조부의 기자정신일까요? 

중요한 사진엔 낙서처럼 일자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때와 장소를 알 수 있었습니다. 

부친께서 조부에 대한 기록들을 노트에 적어 두었기 때문에 

사진의 일자를 보면 그에 대한 이야기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부친께 조부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정말 이런 일이 있었나?’ 할 정도로 

정말 안타까운 일도, 그리고 감동적인 일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조부의 사진첩을 SNS와 제 개인 블로그에 정리를 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조부의 사진과 부친의 노트를 정리해서 기록으로 남겨 그 분들의 삶의 흔적을 

제 자녀들에게 전해줘야 할 책임감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 옛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 조부께서는 이름과 함께 사진을 제게 남기셨습니다. 

그 사진들은 요즘 메모리로 촬영하는 사진과 달리 

필름이 갖고 있는 향수와 감성을 사진을 통해 조부의 흔적들을 느끼게 해 줍니다. 


그런 조부의 영향을 받아서일까요? 

저 역시 대전의 소극장 연극들을 사진으로 재능기부를 3년째 하고 있으며, 

아마추어이지만 특수학교 중학생, 고등학생들이 사용할 수학교과서의 사진도 촬영하였습니다. 

대전의 소극장의 어려운 현실들을 사진으로 남기는 일을 만 3년째 하니 

이젠 제법 많은 분량의 소극장 연극사진들이 쌓였습니다. 


단순히 한 장의 사진일 수 있겠지만, 쌓이고 모여 시간이 흐르면 바로 그것이 역사가 될 것입니다. 

  조부께서 남기신 2권의 사진첩은 ‘사진은 순간을 영원으로 남기는 것’임을 증명합니다. 

왜냐하면 순간에 사그러질 추억을 한 장의 사진으로 만들어 손자인 제게 남기신 사진첩은 

그 자체로 이미 ‘순간에서 영원’한 역사로 승화되었기 때문입니다.   


2회에 계속...

Posted by 공소남 허윤기 덜뜨기

<할아버지의 사진첩을 넘기며...>




(1928년 10월 구세군사관학교)


1928년 9월 "19기 개발자 학기" 입학 

1928년 10월 사관학교 촬영

1928년 12월 구세군 첫 자선냄비 시작


조부(허원조, 제일 뒷줄 우측에서 두 번째/ 조모:김옥녀, 제일 앞쪽 오른쪽에서 세번째 흰옷 여학생)께서 

1928년 9월에 구세군 사관학교(신학교)에 입학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달후 1928년 10월, 구세군 사관학교 전교생 단체사진을 촬영하신 것으로 추측됩니다.


다들 아시는 구세군자선냄비는 조부께서 사관학교를 입학한 그해 겨울 처음으로 대한민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28년은 한국구세군에 있어 의미있는 해로 생각됩니다.


증조모(이신월 전도사)께서는 충북 영동의 "영동제일교회"(기장)에서 34년간 신앙생활을 하셨는데, 

권사를 받으시고 그후 21년간 여전도사로 사역하시고 74세에 소천하셨습니다. 

그 후 조부께서는 지인(신순일 참령)의 권유로 구세군 사관학교로 입학을 하셨습니다.  


조부를 구세군으로 권유한 신순일 참령께서는 신유의 은사를 갖고 계셨는데 

한국 해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손원일 제독의 부인(홍은혜-해군의 어머니로 불림) 병을 안수로 고쳐주셨으며, 

그 후 조부께서 사역하시는 교회에 출석을 하셨습니다. 

제가 해군본부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할 때 직접 만나뵀을 때 

인사를 드리며 조부의 성함을 말씀드렸더니 기억하시더군요.


조부께서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시다가 

1928년 구세군 사관학교(신학교)에 입학을 하시고, 

그 후 조부의 막내아들인 제 부친께서도 1971년에 구세군사관학교에 입학을 하셔서 사역을 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저는 1996년에 뒤늦게 침례신학대학교에 입학을 하여 지금 목사로 사역을 하고, 

지금 신약학 박사논문을 쓰는 중입니다

(제가 침례교로 오게 된 이야기는 외가쪽 이야기를 다루면서 소개하겠습니다).


빛바랜 조부의 신학교(구세군 사관학교) 입학 사진 한 장은

언제나 제 마음 속에 이름모를 뜨거운 감동을 불러 일으킵니다.

Posted by 공소남 허윤기 덜뜨기

<할아버지의 사진첩을 넘기며...> - 1952년 4월




조부(허원조 사관)께서는 한국전쟁이 일어날 당시 구세군 서울 후생학원 원장으로 계셨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고아들을 버리고 피난을 갈 수 없다고 남아 계셨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점점 악화되자 원생들을 모두 데리고 피난을 결정하였습니다. 하지만 방법에 있어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군과 한국군 장교의 도움으로 대부분의 원생들을 데리고 피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주도로 피난을 가신 후 촬영한 사진인 것 같습니다. <촬영일자 1951년 4월 20일>

장소는 성산일출봉 근처로 생각됩니다.




미군 LST배를 타고 제주도로 피난을 가신 후, 조부께서는 구세군 제주 후생학원을 설립하게 됩니다. 

사진 중앙에 군복을 입고 앉아 계신 분이 제 조부(허원조 사관), 조모(김옥녀 사관)이십니다.

당시 제 부친(허진 사관)은 8살의 어린이였습니다.









조부(허원조 사관)께서는 미군의 도움으로 제주도로 함께 피난을 가신 후 "제주후생학원"을 세우신 후, 전쟁고아들을 보살피셨습니다. 동아일보 기자이셨던 조부께서는 사진을 남기시는 일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또한 음악에 관심이 많으셨던 터라 구세군 후생학원 브라스밴드를 만들어 원생들에게 금관악기를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당시 브라스밴드는 대한민국에 몇 개 되지 않았던 때라고 합니다.







<1953년 제주 구세군후생학원(원장 허원조 부령/ 제 조부)이 제주읍장에게 감사장 전달>


조부께서 전쟁 발발 직후 개성에서 피난 민 500명을 구호해 주고, 후생학원 215명의 고아들 수용 중 친자식처럼 여겨 버리고 피난을 갈 수 없어 아이들을 모아 놓고 유언을 하셨습니다.

"애들아 나는 너희들을 버려두고 차마 어디로든 갈 수가 없다. 공산군이 오면 우리 내외는 죽일 것이다. 난 여기서 죽을 결심을 했다. 내가 죽거든 뒷산에 묻고, 내 아들 딸은 원장 자식이라 하지 말고 같이 살아라. 공산군은 고아는 죽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구세군 사관 자녀 7명도 함께 보호했는데, 한 사람도 비밀을 발설하지 않고 모두 고아로 속여서 죽음을 면하게 해 주었습니다(인민군으로 입대를 시키려는 것을 고아라는 이유로 읍소하여 입대를 면할 수 있게 함). 그리고 당시 구세군 사령관 관사와 구세군 사관학교에 <고아원 분원>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고아들을 수십명씩 낮에 뛰어놀게 해서 빼앗기지 않게 했는데, 당시 고아원의 원아 한 명도 인민군에 입대시키지 않게 지키셨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경성방송국에 하나, 후생학원에 딱 하나 브라스밴드가 있었는데 영국에서 온 제일 좋은 트럼펫이 있는 것을 알고 후생학원에인민군 장교가 와서 후생학원을 접수하겠다고 하며, 악기와 함께 밴드를 모두 납북을 하려고 합니다. 이 때, 조부께서 "내가 잘은 모르겠지만 김일성 장군께서 고아원 악기를 빼앗어 오라고 시켰는가?"라며 따지자 인민군이 따발총으로 할아버지를 쏘려고 하는데 할머니는 놀라서 기절하시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때 때마침 B-29가 후생학원 위로 지나갔는데 놀라서 공중으로 총을 쏘고 일단 넘어갔다가 며칠 후, 악대와 악기를 모두 빼앗아 북한으로 갔다고 합니다. 


* 당시 납북된 후생학원 브라스밴드 17명 명단 *


강태설, 한기석, 김용덕, 이순은, 양태환, 홍갑용, 손희주, 백장기, 김기모, 이종수, 김기영, 차광욱, 정생규, 박종운, 김주영, 이양수, 이길남, 박성수 (진주에서 보낸 정준삼 전사관의 보고서로 명단 확인) 


- 악대원 중에서 고봉호 군만 납북 도중 유일하게 탈출, 후에 육군군악대장 역임.



당시 고아들을 불쌍히 여겨 헌신적으로 살은 이유일지는 모르지만 몇 번이나 위기를 넘기고 살아나셨는데, 당시 인민군은 후퇴하면서 할아버지를 죽이려고 했고, 국군은 들어오면서 인민군과 친하게 지냈다고 죽이려 했는데 잠깐 떠난 피난 때문에 살아 남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215명의 고아 중, 도망가지 않고 남아 있는 고아 170명만 제주로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170명이나 되는 피난을 갈 방법이 없어 피난을 갈 수 없는 도중에 인민군이 쳐들어 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조부께서는 서투른 영어로 미군을 찾아가 고아원 원장임을 밝히고 200명 가까이 데리고 사는데 불쌍한 아이들을 데리고 피난을 갈 방법이 없다고 하소연을 하면서 '당신도 자식들이 있지 않는가?'라며 서투른 영어로 말을 하자, 장교가 감동을 받아 책임지고 피난을 약속, 부산까지 군용트럭에 싣고 가서 부산항에서 LST배를 타고 제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주후생학원 원장으로 계시면서 부활주일 야외예배, 그리고 체육활동 등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신 것을 살펴보면서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Posted by 공소남 허윤기 덜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