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담는 세상

<할아버지 사진첩을 펼치며 6화> 


[전국유일의 아침식사 배식처, 구세군 마포급식소 이야기]




지난 5화는 구세군대전혜생원(1955년 3월 29일~1957년 9월 27일)의 이야기를 소개해드렸습니다. 


이번 6화에서는 대전혜생원을 떠나 경주(1957년 9월 27일~1958년 10월 26일)로 가셨다가 


2년 후 서울의 구세군 마포교회(1958년 10월 26일~1964년 6월 25일)에서의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구세군 마포교회 급식소 배식 장면]




조부의 사진첩에서 가장 많은 분량의 사진이 있는 구세군마포교회(3대 목회자)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당시 서울의 마포는 어렵기로 소문난 지역 중 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포에 구세군 급식소를 설치하여 운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구세군에서는 총 7군데의 급식소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는데,

 

조부께서 맡으셨던 마포에서는 한국 사람들은 아침을 든든히 먹어야 한다며


본영에 요청하여 새벽부터 급식을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급식소를 찾는 분들 사이에서 “아침은 마포에서, 점심은 서대문에서...”라는 말이 회자되었다고 합니다. 

 






[조부 회갑기념 사진(1962.10.27)]




제가 보기엔 마포영문은 조부께 가장 의미 있는 곳으로 보입니다. 


조부께서는 이곳에서 회갑(1962년)을 맞으셨습니다. 






[한강변 이촌동 수재민 부락에 세운 천막교회(1962.11.11)]




회갑 때 들어 온 돈으로 


한강 변 서울 이촌동 수재민 부락에 천막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 천막교회는 1965년 11월 25일에 봉천동으로 이사하여 현재의 구세군 봉천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마포에서 6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급식을 하시다보니 몸이 많이 상하게 되셨습니다.


극도의 스트레스와 피곤으로 인해 결국 담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침 배식을 마친 후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였고, 그날부터 3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수술 후(1962년~1963년 사이 2번에 걸쳐 담낭 절제 수술) 몸은 더욱 악화되어 목회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조부의 마포에서 6년간의 목회 동안에 400명의 회개인이 늘었다고 합니다.

 

또한 수술 후 담당의(담당의사 허경발 박사)는 2년 밖에 살 수 없다고 하셨으나 


14년을 더 사시면서 많은 일들을 하셨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구세군 마포교회 급식소 전경]




구세군 마포 급식소는 조부의 사역 중 가장 힘들었지만 가장 보람있는 곳 중의 하나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다른 급식소는 점심 급식을 운영하였으나 


유독 조부께서만 새벽부터 힘들게 아침급식을 운영하셨습니다.



하지만 조부께서 급식소를 운영하면서 급식물량을 빼돌린다는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셨습니다. 


결국 경찰까지 출동하여 장부와 재고조사를 하였으나 


허위임이 밝혀지게 되어 계속 운영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부께서는 이 일로 마음에 많은 상처를 받으시고 이로 인해 몸도 상하게 되어 


결국 담석으로 인한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조부께서는 이 수술로 인해 약해진 몸에도 불구하고 목회와 급식에 더욱 힘을 쏟으셨습니다. 


하지만 조부의 건강을 핑계로 다른 목회지로 이동할 것을 요구하는 일부 성도들의 성화가 구세군 본영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구세군 본영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조부로 하여금 1964년 6월 25일, 


구세군 저동교회로 이동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이 명령은 조부로 하여금 많은 상처를 받게 하였고, 


이로 인해 결국 새로 옮겨간 구세군 저동교회에서 63세로 조기 은퇴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서울 뚝섬침례교회 유종수 목사와 함께(2015.1.10)]



이렇게 마포에서의 길고도 힘들었던 목회의 끝은 조부로 하여금 실망으로 끝을 맺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마포에서의 6년간 목회에서 숨은 열매가 맺혀지고 있었습니다. 


현재 서울 뚝섬침례교회에서 목회하시는 유종수 목사 가정은 당시 조부와 함께 급식소에서 봉사를 하였습니다.

 

조부께서는 10명이나 되는 대가족인 유종수 목사의 가정을 남달리 걱정하시며 아끼셨고 


이것이 지금도 인연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2000년에 신학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뚝섬침례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5월에 제 결혼식 주례를 해주셨습니다.


제게는 2년간 짧은 기간의 전도사 사역이었지만 지금도 큰 일이 생기면 목사님을 찾아 뵙고 조언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조부의 흔적이 부친에게까지 이어지고, 그 인연은 저에게까지 직접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은혜를 악으로 갚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은혜를 기억하고 보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부께 은혜를 입은 분들 중에 그것을 악으로 갚았던 사람보다는 


그 은혜를 기억하고 보답하려는 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분들에게 조부는 언제나 사람을 아끼며 선을 베풀었으며 목회자이지만 


자신들의 친정아버지처럼 생각하며 믿고 따를 수 있는 분으로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우연하게 시작한 조부의 사진첩 이야기를 연재하며 만났던 그 분들의 그 기억은 


저로 하여금 또 다른 사람에게 조부의 행하셨던 흔적을 기록하게 만들었고, 


그 기록을 남기는 저로 하여금 조부의 행적을 제 삶의 또 다른 목표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제 그 목표를 실천으로 옮겨야만 할 이유가 생긴 셈입니다. 


제게 또 다른 삶의 목표를 발견하게 한 조부의 사진첩, 


소중히 보관하며 마음에 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덜뜨기 덜뜨기

<할아버지의 사진첩을 넘기며...>




(1928년 10월 구세군사관학교)


1928년 9월 "19기 개발자 학기" 입학 

1928년 10월 사관학교 촬영

1928년 12월 구세군 첫 자선냄비 시작


조부(허원조, 제일 뒷줄 우측에서 두 번째/ 조모:김옥녀, 제일 앞쪽 오른쪽에서 세번째 흰옷 여학생)께서 

1928년 9월에 구세군 사관학교(신학교)에 입학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달후 1928년 10월, 구세군 사관학교 전교생 단체사진을 촬영하신 것으로 추측됩니다.


다들 아시는 구세군자선냄비는 조부께서 사관학교를 입학한 그해 겨울 처음으로 대한민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28년은 한국구세군에 있어 의미있는 해로 생각됩니다.


증조모(이신월 전도사)께서는 충북 영동의 "영동제일교회"(기장)에서 34년간 신앙생활을 하셨는데, 

권사를 받으시고 그후 21년간 여전도사로 사역하시고 74세에 소천하셨습니다. 

그 후 조부께서는 지인(신순일 참령)의 권유로 구세군 사관학교로 입학을 하셨습니다.  


조부를 구세군으로 권유한 신순일 참령께서는 신유의 은사를 갖고 계셨는데 

한국 해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손원일 제독의 부인(홍은혜-해군의 어머니로 불림) 병을 안수로 고쳐주셨으며, 

그 후 조부께서 사역하시는 교회에 출석을 하셨습니다. 

제가 해군본부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할 때 직접 만나뵀을 때 

인사를 드리며 조부의 성함을 말씀드렸더니 기억하시더군요.


조부께서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시다가 

1928년 구세군 사관학교(신학교)에 입학을 하시고, 

그 후 조부의 막내아들인 제 부친께서도 1971년에 구세군사관학교에 입학을 하셔서 사역을 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저는 1996년에 뒤늦게 침례신학대학교에 입학을 하여 지금 목사로 사역을 하고, 

지금 신약학 박사논문을 쓰는 중입니다

(제가 침례교로 오게 된 이야기는 외가쪽 이야기를 다루면서 소개하겠습니다).


빛바랜 조부의 신학교(구세군 사관학교) 입학 사진 한 장은

언제나 제 마음 속에 이름모를 뜨거운 감동을 불러 일으킵니다.

Posted by 덜뜨기 덜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