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담는 세상

<할아버지 사진첩을 펼치며 6화> 


[전국유일의 아침식사 배식처, 구세군 마포급식소 이야기]




지난 5화는 구세군대전혜생원(1955년 3월 29일~1957년 9월 27일)의 이야기를 소개해드렸습니다. 


이번 6화에서는 대전혜생원을 떠나 경주(1957년 9월 27일~1958년 10월 26일)로 가셨다가 


2년 후 서울의 구세군 마포교회(1958년 10월 26일~1964년 6월 25일)에서의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구세군 마포교회 급식소 배식 장면]




조부의 사진첩에서 가장 많은 분량의 사진이 있는 구세군마포교회(3대 목회자)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당시 서울의 마포는 어렵기로 소문난 지역 중 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포에 구세군 급식소를 설치하여 운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구세군에서는 총 7군데의 급식소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는데,

 

조부께서 맡으셨던 마포에서는 한국 사람들은 아침을 든든히 먹어야 한다며


본영에 요청하여 새벽부터 급식을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급식소를 찾는 분들 사이에서 “아침은 마포에서, 점심은 서대문에서...”라는 말이 회자되었다고 합니다. 

 






[조부 회갑기념 사진(1962.10.27)]




제가 보기엔 마포영문은 조부께 가장 의미 있는 곳으로 보입니다. 


조부께서는 이곳에서 회갑(1962년)을 맞으셨습니다. 






[한강변 이촌동 수재민 부락에 세운 천막교회(1962.11.11)]




회갑 때 들어 온 돈으로 


한강 변 서울 이촌동 수재민 부락에 천막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 천막교회는 1965년 11월 25일에 봉천동으로 이사하여 현재의 구세군 봉천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마포에서 6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급식을 하시다보니 몸이 많이 상하게 되셨습니다.


극도의 스트레스와 피곤으로 인해 결국 담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침 배식을 마친 후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였고, 그날부터 3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수술 후(1962년~1963년 사이 2번에 걸쳐 담낭 절제 수술) 몸은 더욱 악화되어 목회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조부의 마포에서 6년간의 목회 동안에 400명의 회개인이 늘었다고 합니다.

 

또한 수술 후 담당의(담당의사 허경발 박사)는 2년 밖에 살 수 없다고 하셨으나 


14년을 더 사시면서 많은 일들을 하셨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구세군 마포교회 급식소 전경]




구세군 마포 급식소는 조부의 사역 중 가장 힘들었지만 가장 보람있는 곳 중의 하나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다른 급식소는 점심 급식을 운영하였으나 


유독 조부께서만 새벽부터 힘들게 아침급식을 운영하셨습니다.



하지만 조부께서 급식소를 운영하면서 급식물량을 빼돌린다는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셨습니다. 


결국 경찰까지 출동하여 장부와 재고조사를 하였으나 


허위임이 밝혀지게 되어 계속 운영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부께서는 이 일로 마음에 많은 상처를 받으시고 이로 인해 몸도 상하게 되어 


결국 담석으로 인한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조부께서는 이 수술로 인해 약해진 몸에도 불구하고 목회와 급식에 더욱 힘을 쏟으셨습니다. 


하지만 조부의 건강을 핑계로 다른 목회지로 이동할 것을 요구하는 일부 성도들의 성화가 구세군 본영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구세군 본영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조부로 하여금 1964년 6월 25일, 


구세군 저동교회로 이동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이 명령은 조부로 하여금 많은 상처를 받게 하였고, 


이로 인해 결국 새로 옮겨간 구세군 저동교회에서 63세로 조기 은퇴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서울 뚝섬침례교회 유종수 목사와 함께(2015.1.10)]



이렇게 마포에서의 길고도 힘들었던 목회의 끝은 조부로 하여금 실망으로 끝을 맺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마포에서의 6년간 목회에서 숨은 열매가 맺혀지고 있었습니다. 


현재 서울 뚝섬침례교회에서 목회하시는 유종수 목사 가정은 당시 조부와 함께 급식소에서 봉사를 하였습니다.

 

조부께서는 10명이나 되는 대가족인 유종수 목사의 가정을 남달리 걱정하시며 아끼셨고 


이것이 지금도 인연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2000년에 신학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뚝섬침례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5월에 제 결혼식 주례를 해주셨습니다.


제게는 2년간 짧은 기간의 전도사 사역이었지만 지금도 큰 일이 생기면 목사님을 찾아 뵙고 조언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조부의 흔적이 부친에게까지 이어지고, 그 인연은 저에게까지 직접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은혜를 악으로 갚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은혜를 기억하고 보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부께 은혜를 입은 분들 중에 그것을 악으로 갚았던 사람보다는 


그 은혜를 기억하고 보답하려는 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분들에게 조부는 언제나 사람을 아끼며 선을 베풀었으며 목회자이지만 


자신들의 친정아버지처럼 생각하며 믿고 따를 수 있는 분으로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우연하게 시작한 조부의 사진첩 이야기를 연재하며 만났던 그 분들의 그 기억은 


저로 하여금 또 다른 사람에게 조부의 행하셨던 흔적을 기록하게 만들었고, 


그 기록을 남기는 저로 하여금 조부의 행적을 제 삶의 또 다른 목표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제 그 목표를 실천으로 옮겨야만 할 이유가 생긴 셈입니다. 


제게 또 다른 삶의 목표를 발견하게 한 조부의 사진첩, 


소중히 보관하며 마음에 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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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사진첩을 넘기며...4화> - 절망 속에서 지켜야 할 동심



<촬영일자 1951년 4월 20일>


이번에는 대한민국의 슬픈 역사, 1950년대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조부께서 전쟁 발발 직후 개성에서 피난 민 500명을 구호해 주고, 서울 후생학원 215명의 고아를 수용 중 서울까지 처들어 온 공산당을 피해 피난을 가야 했지만, 고아들을 친자식처럼 여겨 버리고 피난을 갈 수 없어 결국 아이들을 모아 놓고 유언을 하셨습니다.


 "애들아 나는 너희들을 버려두고 차마 어디로든 갈 수가 없다. 공산군이 오면 우리 내외는 죽일 것이다. 난 여기서 죽을 결심을 했다. 내가 죽거든 뒷산에 묻고, 내 아들 딸은 원장 자식이라 하지 말고 같이 살아라. 공산군은 고아는 죽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렇게 유언을 하셨는데, 그 중에는  구세군 사관(목사) 자녀 7명도 함께 보호를 하고 있었는데, 고아들 중 한 사람도 비밀을 발설하지 않고 모두 고아로 속여서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인민군으로 입대를 시키려는 것을 고아라는 이유로 읍소하여 입대를 면할 수 있게 해 주었다고 함). 그리고 당시 구세군 사령관 관사와 구세군 사관학교에 <고아원 분원>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고아들을 수십명씩 낮에 뛰어놀게 해서 빼앗기지 않게 했다고 합니다.


당시 브라스밴드가 경성방송국에 하나, 후생학원에 하나가 있었는데, 당시 영국에서 온 제일 좋은 트럼펫이 후생학원에 있는 것을 알고 인민군 장교가 와서 접수하겠다고 하며, 악기와 함께 밴드를 모두 납북을 하려고 했답니다. 이때, 조부께서 "내가 잘은 모르겠지만, 김일성 장군께서 고아원 악기를 뺏어 오라고 시켰는가?"라며 따지자 인민군이 따발총으로 할아버지를 쏘려고 하는데 할머니는 놀라서 기절하시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공산당 장교는 일단 넘어갔다가 며칠 후, 악대와 악기를 모두 빼앗아 북한으로 갔다고 합니다. 


* 당시 납북된 후생학원 브라스밴드 18명 명단 *


강태설, 한기석, 김용덕, 이순은, 양태환, 홍갑용, 손희주, 백장기, 김기모, 이종수, 

김기영, 차광욱, 정생규, 박종운, 김주영, 이양수, 이길남, 박성수 

(진주에서 보낸 정준삼 사관의 보고서로 명단 확인) 


- 악대원 중에서 고*호 군만 납북 도중 유일하게 탈출, 후에 육군군악대장 역임.



당시 고아들을 불쌍히 여겨 헌신적으로 살은 이유일지는 모르지만 몇 번이나 위기를 넘기고 살아나셨는데, 당시 인민군은 후퇴하면서 할아버지를 죽이려고 했고, 국군은 들어오면서 인민군과 친하게 지냈다고 죽이려 했는데 잠깐 떠난 피난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215명의 고아 중, 도망가지 않고 남아 있는 고아 170명만 제주로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170명이나 되는 피난을 갈 방법이 없어 피난을 갈 수 없는 도중에 인민군이 쳐들어 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조부께서는 서투른 영어로 미군을 찾아가 고아원 원장임을 밝히고 200명 가까이 데리고 사는데 불쌍한 아이들을 데리고 피난을 갈 방법이 없다고 하소연을 하면서 '당신도 자식들이 있지 않는가?'라며 서투른 영어로 말을 하자, 장교가 감동을 받아 책임지고 피난을 약속, 부산까지 군용트럭에 싣고 가서 부산항에서 LST배를 타고 제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군과 한국군 장교의 도움으로 대부분의 원생들을 데리고 피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군 LST배를 타고 제주도로 피난을 가신 후, 조부께서는 구세군 제주 후생학원을 설립하게 됩니다. 







사진 중앙에 군복을 입고 앉아 계신 분이 제 조부(허원조 사관), 조모(김옥녀 사관)이십니다. 당시 제 부친(허진 사관)은 8살의 어린이였습니다(우측에서 4번째 검은색 새라복을 입은 어린이). - 아이들의 옷에 새겨진 SABH는 The Salvation Army Boy's Home; 구세군 후생학원의 약자입니다.





(사진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일본주재 미공군단에서 풍금을 제주후생학원에 기증할 때 촬영한 것으로 보아 1952년 정도로 추정)


조부(허원조 사관)께서는 미군의 도움으로 제주도로 함께 피난을 가신 후 "제주후생학원"을 세우신 후, 전쟁고아들을 보살피셨습니다. 동아일보 기자이셨던 조부께서는 사진을 남기시는 일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또한 음악에 관심이 많으셨던 터라 구세군 후생학원 브라스밴드를 만들어 원생들에게 금관악기를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당시 브라스밴드는 대한민국에 몇 개 되지 않았던 때라고 합니다. 이렇게 음악을 배운 아이들과 함께 피난하고 있던 제주 지역사회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1953년 제주 구세군후생학원(원장 허원조 부령)이 제주읍장에게 감사장 전달>


그렇게 제주도에서 고아들을 양육하며 음악을 가르치신 것으로 1953년 10월 17일 제주읍장에게 감사장을 전달하며 지역사회에서 고아들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들을 하신 것 같습니다. 사진과 음악에 관심 많으셨던 조부께서는 이렇게 전쟁 이전과 전쟁 속에 부모님을 잃은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신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었던 한국전쟁 속에서도 흔들리면 안되는 동심을 위한 조부의 노력을 몇 장의 사진으로 보면서 손자인 제가 코끝 찡한 감동을 받습니다. 2014년의 대한민국도 힘들고 어려운 시간 속에 있지만 그럼에도 절망은 희망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희망으로 일어서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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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소년들에게 나팔과 삽빗자루를 주다 >




<포항구세군 소년부 청소대원 일동, 1936 4>


 조부께서는 사부동(1931)을 떠나 낙평(1932), 영덕(1934)에서 목회를 하시다가 1935년에 포항으로 목회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구세군은 현재에도 군대처럼 발령을 받아 목회지를 옮기는 방식을 갖고 있습니다그래서 당시 조선 총독부에서는 구세군을 영국 군대로 이해하고 위협적인 존재로 생각을 하여 예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그래서 다른 교단의 목회자들과는 달리 구세군 사관(목사)의 발령에 대해서만 조선총독부 관보에 기재를 하였습니다덕분에 일제치하에서의 구세군 사관의 발령 기록은 구세군의 기록보다 더 정확하다는 웃지 못 할 일도 있습니다.


  구세군 포항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 1935년 이후 1년 반 동안에 280명이 회개를 하였다는 놀라운 기록을 발견하였는데 이 한 장의 사진을 보고 기록의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조부께서 부임하던 1935년 이전에 구세군 포항교회는 전임 목회자의 문제로 인해 교회가 문을 닫은 상태였기 때문에 교인이 거의 없었습니다이런 상황에서 조부께서는 소년들을 모아 손에 나팔과 삽빗자루를 나눠주고 새마을 운동처럼 동네 청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처음 시작할 때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던 주민들이 소년들의 청소가 시작됨을 알리는 나팔소리와 함께 동네가 깨끗해지는 모습을 보며 조금씩 동참을 하기 시작했고이것이 구세군 포항교회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주게 되었습니다조부의 목회 1년 반 만에 280명이나 되는 분들이 회개를 하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 교회를 향한 사회의 시선이 냉소적임을 알고 있습니다조부와 부친의 뒤를 이어 목사인 저 역시 이 현상에 대해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교회의 이기적인 모습과 교회답지 못한 모습에 실망하는 것은 목사인 저의 잘못 역시 크기 때문입니다조부께서는 이미 78년 전에 세상 속에서 교회의 역할에 대한 중요성을 알고 교회를 키우는 일이 아닌 동네를 위한 교회의 일을 찾아 교회 밖으로 나가셨다니 놀랍습니다왜냐하면 일제치하에서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들을 찾아 모범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삶을 선택하셨던 조부의 모습을 사진으로 만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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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 산골짜기 동네에서 본격적인 목회를 시작하다>

 






사부동 교회(경북 의성군 봉양면 사부동) 현재 노매실 교회 (1929년 초임 1931.6.27.)



  구세군 사부동 교회(경북 의성군 봉양면 사부동)는 조부께서 1929년 구세군사관학교 졸업 후 처음 발령받아 목회를 시작한 곳입니다. 이 사부동은 가구수가 총 47호였는데, 조부께서 목회를 하는 3년 동안 46호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구세군 사부동 교회는 191139일에 처음 개척을 한 곳으로 낡고 허름한 건물이었는데, 조부의 목회 이전부터 영문 건축목적 헌금 400(당시 소 한 마리 3)을 모아온 헌금을 11명의 개인이 개인들의 친목자금이라 주장하여 그간 건축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을 조부께서 대화로 해결하여 400원의 헌금을 다시 회수하여 당시 최신식의 건물로 건축을 하였습니다. 이 사진은 새로 건축한 구세군 사부동 교회를 배경으로 낙평으로 떠나기 전에 촬영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습니다. 이 정도 건물에 이 정도 교인이라면 동네가 제법 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현재의 사부동 교회를 찾아봤습니다(현재 노매실). 동네를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동네가 총 47호라는데 정말 산골에 이 동네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더군요. 지금도 이렇게 산동네인데 85년 전에는 어떠했을지 생각하니 막막하기만 합니다. 당시 27살의 조부께서 첫 목회지에서 이런 일을 하신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사진첩을 펼쳐보며 흔적을 더듬어 가면 갈수록 저 역시 사진 속의 세상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것 같아 흥분이 됩니다.

 

 



  침례교 교회진흥원 류정선 목사님께서 1997년에 쓰신 사부동(현재 노매실) 교회에 관련 글을 보내주셔서 소개합니다. 목사님의 기록에 따르면 사부동교회 건물 2차 건축을 1930년에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조부께서 하신 것입니다. 자료를 보내주신 류정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믿음으로 떠나는 사진여행 : 의성 구세군 노매실 영문

 

바위를 뚫는 뿌리의 힘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 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 이사야 60, 1 - 3

 

구세군 노매실 영문

 

요즈음 필자는 한국교회사를 영상에 담은 복음의 땅 한반도란 비디오 테잎을 구입하여 시간 여유가 있을 때 마다 시청하고 있다. 복음의 불모지인 낯선 이 땅은 찾은 선교사들의 이야기와 복음을 받아들인 한국 초대교회의 수난과 순교, 그리고 눈물 속에서 신앙의 열매를 맺으면서 성장하는 한국교회의 부흥은 믿음의 선배에 대한 경외심과 목회자로서의 각오를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번 여행은 이러한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뜻 있는 탐방이 되었다. 대구를 거쳐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인 중앙고속도로를 역류하여 경북 의성을 빠져 나왔다. 봉양면을 지나 917번 도로를 10여분 달리면 사부 1리 초입이 나오고, 여기에서 산길을 조금 올라가면 노매실이란 옛 이름의 사부 2리가 나온다.


계절은 벌써 초여름을 노래하고 있다. 산천초목에 물이 올라 신록의 싱그러움은 찾아볼 수가 없다. 무논의 어린 모들은 수면 위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고, 야산의 마늘 밭은 아기자기한 능선을 따라 잎 끝이 바짝 타고 있었다. 사부 2리에 들어서면 붉은 벽돌과 십자가 첨탑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곳이 구세군 경북지방 노매실 영문이다. 구세군은 성탄 자선남비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만큼 생경한 교단이기도 하다. 편제와 용어가 상이해서 왠지 어색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이루어 나가기 위한 개신교단의 하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감안하니 다감한 정취가 생겨난다.

 

 

전통의 뿌리가 깊게 자리 잡은 교회

 

필자가 정오 무렵에 도착하였다. 이번 여행은 대전 성남동 영문의 김최환, 최을순 사관 내외분이 동행을 하였다. 구세군 교회를 소개할 수 있도록 부탁하였더니, 노매실 영문을 추천하고 기꺼이 동행을 해주었다. 약속 시간보다 늦게 도착하였는데 조태규, 김향복 사관 내외와 최재구 정교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떻게 시장기를 알았는지 금새 식탁이 풍성하게 차려졌다. 신토불이라 했던가! 된장국에 조가 노랗게 섞인 밥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치워버렸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옛 맛이 실린 식사였다. 식사를 하면서 원고정리에 필요한 얘기를 두서없이 나누었다.

 

노매실 영문은 84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전통의 뿌리가 깊게 자리 잡아 비록 산골이지만 아름다운 교회의 내적인 모습을 품에 안고 있었다. 노매실 영문은 이 땅이 일본에 합병된 다음해에 배주역 군우(성도)가 처가인 이곳에 와서 가정예배를 드리다 강국원 정교(장로)에 의해서 3월에 개영(창립)되었고, 초대 유진선 사관(목사)이 부임하여 그해 구회당 명칭으로 예배당을 세우는데 석가래를 70리 밖에서 가져왔고, 흙 돌을 손수 찍어 건축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마을까지 시멘트로 포장이 되었지만 그 당시를 생각한다면 교회를 사랑하고 헌당하려는 초기 성도들의 땀과 기도를 생각치 않을 수가 없다. 이곳 예배당은 마을 중앙에 2차로 1930년에 다시 교회를 헌당하였는데 아쉽게도 일제하에 의하여 1942년 철거를 당하였다. 이 당시 50여호의 모든 주민이 출석할 정도로 가장 부흥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교회는 해산되었는데 당시 박경학 정교가 가정 예배를 이끌면서 해방 후에 그 전통을 이어가다 1958년에 초가 4칸으로 3차 헌당을 하였고, 이때 사부동 영문을 노매실 영문으로 개명하였다.


지금의 예배당은 5차 헌당을 한 것인데 19877, 대지 212평 건평 38평 사택 18평을 건축하면서 본 영문 출신의 강환구 장로(대구 침산장로교회)가 공사를 맡아 온 군우의 자발적 참여로 25백 만원의 비용이 소요되었다. 당시 상황은 연인원으로 살펴보면 군우 515, 가정단 250, 모래자갈 256, 경운기 239, 기술자 153명이 수고하였다.


<여기에서 잠시 언급하고 있다. 사실 이번 탐방은 거의 취재가 필요없었다. 교회(편의상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의 연혁을 초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진과 자료가 첨부되어 모두 정리되어 있었다. 그 오랜 역사를 소홀함 없이 모두 기록하여 어느 누가 보던지 그 흐름을 파악할 수가 있다. 물론 교회 연혁 및 목회일지를 지방 장관에게 매년 인준을 받아야 하는 구세군의 특성도 있지만 한국의 모든 교회가 이러한 기록을 남기는 일이 부족한 것 같다. 교회 연감을 만들면서 그 사료가 없어 작업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비! 조금만 내리세요(?)

 

노매실(老梅實)은 늙은 매화나무에서 열매를 맺는다는 뜻을 가진 지명이다. 옛날 어느 노씨라는 사람이 칡이 많아 피난처로 생각하고 들어와 마을이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지만, 그보다 오랜 전통의 교회가 복음의 열매를 맺고있다는 뜻의 이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생겨난다. 이곳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첩첩산중이라서 울고 와서 울고 가는 교회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노매실로 부임할 때 하나님의 뜻이란 믿음으로 지금까지 49명의 담임이 부임하여 그 토양을 일구고 가꾸었다.


조태규 사관(43)은 호남신학교를 졸업하고 김향복 사모와 함께 구세군 사관학교를 87년도에 졸업하고 충북 보은 영문에서 사역하다 노매실로 발령을 받고 923월에 이삿짐과 함께 들어왔다고 한다. 계속 교회를 찾아 산 속을 들어왔지만 마을이 나오질 않아 하늘 보고 울기도 하였다는데, 모든 성도가 모두 나와 부임을 환영할 때는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났고, 이제는 목회를 하며 감사한 일들이 많아 눈물이 나온다고 한다.


노매실은 현재 40세대 137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업은 약간의 논과 밭을 일구고 있으며 고추, 마늘을 생산하고 있다. 주민의 평균연령은 57.5세로 고령화 되어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아동 진학은 도리원 초등학교로 12, .고등학생은 봉양으로 18명이 통학하고 있다. 모두 10리가 넘는 곳인데 초등학교는 교육청 버스가 운행되고 있고, 학생들은 조태규 사관이 작은 버스로 통학시키고 있다.


교세 현황은 병사(세례교인)130여명으로 출석군우는 45명인데 정교 4, 부교(집사) 36명이 직분을 맡고 있다. 마을의 학생은 모두 출석하고 있으며 강성인 정교와 몇 명의 청년이 교회학교를 담당하고 있다.

특히 가정단(여전도회)은 그 운영과 사회 봉사가 전국 구세군 영문에서 모범적인 기관으로 선정이 되어 515일에 군국(총회)의 우등상을 받았다. 마을의 마늘 수확을 협동으로 일하여 받은 노임을 모아 사회 구제와 여성사업(주민 교육 및 친교)에 앞장 서고 있다. 마을에 초상이 났을 때 기독교 식으로 통일하여 상여를 십자가로 덮은 성과가 있었다고 한다.


조태규 사관은 후덕하고 푸짐하다. 체격에 어울리게 마을과 교회의 일에 몸을 아끼지 않고 있다. 학생 통학을 위하여 버스 운행을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학생들을 모두 신앙을 갖게 하였고, 부임하자 마자 주민들의 숙원인 초등학교 편제 구역을 옮기기 위하여 교육청과 기관을 뛰어다닌 끝에 산 너머로 다녀야 했던 학생들의 불편을 해소하여 마을 전체의 초등학생을 전학시킨 노력을 인정 받아 주민들은 교회에 협조적이라고 한다. 특히 청소년 선교 및 교육에 관심이 많아 대구, 경북지역 경생보호위원으로 활동하여 지역사회의 일꾼으로 봉사하고 있다. 이에 따라 노매실 영문은 봉양면 지역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한참 담소를 나누는데 김향복 사모가 마을 형편을 슬쩍 언급하고 나섰다. 의성 마늘이 전국적으로 그 매운 맛이 일품인데 그것은 가뭄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가뭄만큼 매운 맛이 드는데 비가 오질 않아 목회에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매년 계속되는 한해(旱害 )로 인해 늘 하늘 보고 하나님 비 안주면 어떻게 합니까?’하며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은 올해의 기도 제목을 아예 거두어 가셨다. 중앙에서 호주의 어느 군우가 헌금한 약 45백 만원을 지원하여 마을에 양수장을 설치하게 되었다. 이 사업을 위해 당국의 지원과 주민의 협조를 위하여 동분서주하고 있다.


교회에서 매년 농촌과 도시를 잇는 농산물 직거래를 주선하고 있다. 마늘과 참깨, 고추를 교회나 기관의 사업차원으로 추진하고 싶은 곳이 있다면 노매실 영문으로 연락하면 양품의 농산물을 정량으로 수매할 수가 있다. 매년 대량으로 직거래를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그 신용은 한번도 실망을 준 적이 없다고 함께 있던 최재구 정교가 귀 띰을 한다.

최재구 정교(64)는 다른 분도 마찬가지지만 노매실 영문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다가 그 품에 안길 산 증인이다. 7월이면 40주년 장기근속을 한다. 정교 근속도 24년 째이다. 금년부터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종을 치는 청지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강성우 정교(86)가 장애를 무릅쓰고 이 일을 담당했는데 근력이 달려 그 끈을 넘겨주었다. 이에 하나님께서 가장 큰 일을 주셨다고 감사한 마음으로 노매실의 하늘에 천상의 소리가 울려 퍼지게 하고 있다. 최재구 정교의 아들로 재천 영문(최영호 사관)에서 사역하고 있는데, 구세군이 아니면 갈 곳이 없을 정도로 온 식구가 구세군의 일꾼으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노매실 영문은 교단의 근속장을 받은 사람이 모두 11명이 될 정도로 그 역사만큼 한국 교회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13(구세군 5 성결교 4 감리교 2 장로교 2)의 목회자를 배출하였는데 이들 목회자를 초청하여 내년 85주년 기념예배를 계획하고 있다. 아울러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한국교회의 미덕인 용대 영문(62)과 도리원 영문(83)의 지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구세군 최초의 순교자 : 노영수 사관

 

노매실 영문의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는 구세군 역사에서 최초이며 유일한 순교자인 노영수 사관의 출신 교회라는 것이다. 노매실에서 출생하여 이 곳에서 청년기를 보내고 구세군 사관학교를 마친 노영수 고등참령(참령은 임관이후 20년이 지나야 부여되는 구세군의 계급단위)은 마지막으로 진주 영문에서 사역을 하다가 한국동란 중 피난을 가지 않고 복음을 전하였다. 결국 공산군에 잡혀 19509553세의 일기로 지리산 기슭에서 총상을 당하였다. 그분의 사위로 감신대 이기춘 총장과 원주 기독병원 원목실장인 노태식 목사가 있으며, 순교를 기념해서 진주에 그 기념관이 세워졌다.


이러한 역사와 전통이 깊은 만큼 신앙의 물줄기는 마르지 않고 있다. 나무는 지상에서의 줄기보다 세배가 넘게 뿌리를 내린다고 한다. 뿌리는 물을 찾아 바위를 뚫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에 구세군 노매실 영문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한국교회의 한 부분을 소리없이 자리잡고 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교회 주소 : 769-910 경북 의성군 봉양면 사부2331

(전화) 0576 - 32 - 2407






Posted by 덜뜨기 덜뜨기

할아버지의 사진첩을 펼치며 (1회) 


“사진은 순간을 영원으로 남기는 것”





[1928년 10월, 조부의 구세군사관학교 입학식 사진(광화문 정동)]



15년 전 큰 아버지의 소천 후, 제 부친에게 전해온 2권의 사진첩이 부친의 방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최근에 그 사진첩의 존재를 알게 되어 펼쳐보게 되었습니다. 

그 중 오래된 사진첩의 첫 장의 사진인 86년 전 

조부의 구세군 사관학교(신학교) 입학식 모습은 제게 경외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제 조부, 허원조 사관(목사)은 1902년 5월 8일 경남 고성군 대가면 유흥리에서 

제 증조부 허정현(1873년 10월 20일)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1928년 10월, 구세군 사관학교 19회로 입학을 하였습니다. 

바로 그 해, 다들 아시는 구세군 자선냄비기 처음 시작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 조부는 사관학교 입학 전에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시면서 

갖고 계시던 카메라로 많은 사진들을 남기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많은 사진들 중에서 단 2권만이 현재 남아 제 부친께 남겨졌습니다.


제가 6살이던 1978년 9월 3일에 조부께서 소천하셨기 때문에 저는 조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주위에서 제 조부는 키도 크고 호인이셨다는 말만 들었을 뿐, 

사진을 보기 전엔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진들을 보며 부친께서 제게 전해주시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조부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부에 대한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들으니 너무나도 생생하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1922년 1월, 조부의 약혼식 사진]



  사진첩을 한 장 더 넘기니 1922년 1월에 촬영한 조부의 약혼식 사진이었습니다. 

제 조모 김옥녀 사관은 1905년 7월 19일 충북 옥천에서 김재영 집사의 장녀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3년 이 되던 1925년 1월 결혼을 하셨습니다. 

제 부친이 1945년에 막내로 태어나셨으니 결혼 후 23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지금이야 디지털 사진의 메타 값이 저장되어 있으니 언제 촬영한 사진인지 알 수 있지만 

인화된 사진엔 그런 정보가 없습니다. 

하지만 조부의 기자정신일까요? 

중요한 사진엔 낙서처럼 일자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때와 장소를 알 수 있었습니다. 

부친께서 조부에 대한 기록들을 노트에 적어 두었기 때문에 

사진의 일자를 보면 그에 대한 이야기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부친께 조부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정말 이런 일이 있었나?’ 할 정도로 

정말 안타까운 일도, 그리고 감동적인 일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조부의 사진첩을 SNS와 제 개인 블로그에 정리를 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조부의 사진과 부친의 노트를 정리해서 기록으로 남겨 그 분들의 삶의 흔적을 

제 자녀들에게 전해줘야 할 책임감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 옛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 조부께서는 이름과 함께 사진을 제게 남기셨습니다. 

그 사진들은 요즘 메모리로 촬영하는 사진과 달리 

필름이 갖고 있는 향수와 감성을 사진을 통해 조부의 흔적들을 느끼게 해 줍니다. 


그런 조부의 영향을 받아서일까요? 

저 역시 대전의 소극장 연극들을 사진으로 재능기부를 3년째 하고 있으며, 

아마추어이지만 특수학교 중학생, 고등학생들이 사용할 수학교과서의 사진도 촬영하였습니다. 

대전의 소극장의 어려운 현실들을 사진으로 남기는 일을 만 3년째 하니 

이젠 제법 많은 분량의 소극장 연극사진들이 쌓였습니다. 


단순히 한 장의 사진일 수 있겠지만, 쌓이고 모여 시간이 흐르면 바로 그것이 역사가 될 것입니다. 

  조부께서 남기신 2권의 사진첩은 ‘사진은 순간을 영원으로 남기는 것’임을 증명합니다. 

왜냐하면 순간에 사그러질 추억을 한 장의 사진으로 만들어 손자인 제게 남기신 사진첩은 

그 자체로 이미 ‘순간에서 영원’한 역사로 승화되었기 때문입니다.   


2회에 계속...

Posted by 덜뜨기 덜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