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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6.07 [할아버지의 사진첩] 1952년 4월 제주도피난긔념

<할아버지의 사진첩을 넘기며...> - 1952년 4월




조부(허원조 사관)께서는 한국전쟁이 일어날 당시 구세군 서울 후생학원 원장으로 계셨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고아들을 버리고 피난을 갈 수 없다고 남아 계셨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점점 악화되자 원생들을 모두 데리고 피난을 결정하였습니다. 하지만 방법에 있어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군과 한국군 장교의 도움으로 대부분의 원생들을 데리고 피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주도로 피난을 가신 후 촬영한 사진인 것 같습니다. <촬영일자 1951년 4월 20일>

장소는 성산일출봉 근처로 생각됩니다.




미군 LST배를 타고 제주도로 피난을 가신 후, 조부께서는 구세군 제주 후생학원을 설립하게 됩니다. 

사진 중앙에 군복을 입고 앉아 계신 분이 제 조부(허원조 사관), 조모(김옥녀 사관)이십니다.

당시 제 부친(허진 사관)은 8살의 어린이였습니다.









조부(허원조 사관)께서는 미군의 도움으로 제주도로 함께 피난을 가신 후 "제주후생학원"을 세우신 후, 전쟁고아들을 보살피셨습니다. 동아일보 기자이셨던 조부께서는 사진을 남기시는 일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또한 음악에 관심이 많으셨던 터라 구세군 후생학원 브라스밴드를 만들어 원생들에게 금관악기를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당시 브라스밴드는 대한민국에 몇 개 되지 않았던 때라고 합니다.







<1953년 제주 구세군후생학원(원장 허원조 부령/ 제 조부)이 제주읍장에게 감사장 전달>


조부께서 전쟁 발발 직후 개성에서 피난 민 500명을 구호해 주고, 후생학원 215명의 고아들 수용 중 친자식처럼 여겨 버리고 피난을 갈 수 없어 아이들을 모아 놓고 유언을 하셨습니다.

"애들아 나는 너희들을 버려두고 차마 어디로든 갈 수가 없다. 공산군이 오면 우리 내외는 죽일 것이다. 난 여기서 죽을 결심을 했다. 내가 죽거든 뒷산에 묻고, 내 아들 딸은 원장 자식이라 하지 말고 같이 살아라. 공산군은 고아는 죽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구세군 사관 자녀 7명도 함께 보호했는데, 한 사람도 비밀을 발설하지 않고 모두 고아로 속여서 죽음을 면하게 해 주었습니다(인민군으로 입대를 시키려는 것을 고아라는 이유로 읍소하여 입대를 면할 수 있게 함). 그리고 당시 구세군 사령관 관사와 구세군 사관학교에 <고아원 분원>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고아들을 수십명씩 낮에 뛰어놀게 해서 빼앗기지 않게 했는데, 당시 고아원의 원아 한 명도 인민군에 입대시키지 않게 지키셨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경성방송국에 하나, 후생학원에 딱 하나 브라스밴드가 있었는데 영국에서 온 제일 좋은 트럼펫이 있는 것을 알고 후생학원에인민군 장교가 와서 후생학원을 접수하겠다고 하며, 악기와 함께 밴드를 모두 납북을 하려고 합니다. 이 때, 조부께서 "내가 잘은 모르겠지만 김일성 장군께서 고아원 악기를 빼앗어 오라고 시켰는가?"라며 따지자 인민군이 따발총으로 할아버지를 쏘려고 하는데 할머니는 놀라서 기절하시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때 때마침 B-29가 후생학원 위로 지나갔는데 놀라서 공중으로 총을 쏘고 일단 넘어갔다가 며칠 후, 악대와 악기를 모두 빼앗아 북한으로 갔다고 합니다. 


* 당시 납북된 후생학원 브라스밴드 17명 명단 *


강태설, 한기석, 김용덕, 이순은, 양태환, 홍갑용, 손희주, 백장기, 김기모, 이종수, 김기영, 차광욱, 정생규, 박종운, 김주영, 이양수, 이길남, 박성수 (진주에서 보낸 정준삼 전사관의 보고서로 명단 확인) 


- 악대원 중에서 고봉호 군만 납북 도중 유일하게 탈출, 후에 육군군악대장 역임.



당시 고아들을 불쌍히 여겨 헌신적으로 살은 이유일지는 모르지만 몇 번이나 위기를 넘기고 살아나셨는데, 당시 인민군은 후퇴하면서 할아버지를 죽이려고 했고, 국군은 들어오면서 인민군과 친하게 지냈다고 죽이려 했는데 잠깐 떠난 피난 때문에 살아 남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215명의 고아 중, 도망가지 않고 남아 있는 고아 170명만 제주로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170명이나 되는 피난을 갈 방법이 없어 피난을 갈 수 없는 도중에 인민군이 쳐들어 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조부께서는 서투른 영어로 미군을 찾아가 고아원 원장임을 밝히고 200명 가까이 데리고 사는데 불쌍한 아이들을 데리고 피난을 갈 방법이 없다고 하소연을 하면서 '당신도 자식들이 있지 않는가?'라며 서투른 영어로 말을 하자, 장교가 감동을 받아 책임지고 피난을 약속, 부산까지 군용트럭에 싣고 가서 부산항에서 LST배를 타고 제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주후생학원 원장으로 계시면서 부활주일 야외예배, 그리고 체육활동 등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신 것을 살펴보면서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Posted by 덜뜨기 덜뜨기